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단 편집) === [[권력]]의 길에 오르다 === [[이오시프 스탈린]]은 사망 직전 브레즈네프를 소련 공산당 상무회의 후보위원으로 임명하는 등 브레즈네프에게 주목하기 시작했지만[* 말년의 스탈린은 브레즈네프 외에도 자신의 후계 체제를 준비해야 한다는 구실로 정치적 신인들을 파격적으로 승진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아나스타스 미코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니키타 흐루쇼프]] 등 다른 거물 정치인들은 스탈린의 이런 행보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했으나, 스탈린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너무 갑작스레 승진하여 얼떨떨한 새 후보위원들을 돕지 않거나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식으로 간접 저항했다. 결국 이런 정치적 신인들의 대다수는 시원찮은 일처리 때문에 스탈린에게 찍혀 좌천당했다.] 그에게 본격적으로 일을 맡기기 전에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하면서 [[소련 공산당]] 상무회가 폐지되고, 보다 작은 정치국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후보위원 자리는 자동으로 취소되었으며 서기국에서도 해임되었다. 대신에 새로 구성된 간부회는 브레즈네프를 [[소련 해군|해군]] 정치국장에 임명하였는데 얼마 후 해군성과 육군성이 통합되어 국방성이 되면서 해군 정치부가 사라졌고, 국방성 총정치국 부국장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이에 브레즈네프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에게 편지를 보내서 자신이 이제 50살이 되었고 심장마비와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자신을 우크라이나에서 보내 일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라브렌티 베리야 숙청에도 참가하는 등 브레즈네프는 다시 권력 중심부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1953년 8월, 브레즈네프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53년 9월 전원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처녀지 개간 사업을 선포하면서 1954년 1월 전원회의에서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에 임명되어 말렌코프의 지지자인 제1서기 판텔레이몬 포노마렌코를 보좌하였다. 1954년 2월,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전 제1서기 샤야크메토프는 자아비판을 하고 해임되었으며 포노마렌코와 브레즈네프가 카자흐스탄을 장악하였다. 1955년 2월 8일, 포노마렌코의 후원자인 말렌코프와 흐루쇼프와의 대결에서 패배해서 각료회의 의장에서 축출되자 흐루쇼프는 1955년 5월 8일, 포노마렌코를 폴란드 대사로 임명해서 쫓아내고 브레즈네프가 카자흐스탄을 장악하게 했다. 브레즈네프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처녀지 개간 사업|개척 사업]]을 지도했다. 1956년 2월,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소련 공산당 상무회의 후보위원 겸 서기로서 방위산업, 우주계획, 중공업 및 수도 건설 지휘 임무를 맡았다. 1957년 6월에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이끄는 반당 그룹의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등이 흐루쇼프와 대치한 당 지도권 싸움에서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반당 그룹을 배제한 후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신임을 받으며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정식 구성원이 되었다. 1960년 브레즈네프는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취임해 명목상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당연히 실권은 소련 장관회의 주석을 겸직한 소련 공산당의 제1서기([[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있었지만,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직은 해외여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이때 서유럽의 비싼 의복이나 [[승용차]]에 대해 흥미를 느꼈는데, 이런 취향은 한참 뒤에야 유명하게 되었다. [youtube(lWlme_4QGq0?t=36)] 1961년, 상무회 주석 시절 생환한 [[유리 가가린]]과 포옹하고 입맞춤하는 브레즈네프.[* 후술하겠지만 브레즈네프가 즐겨하던 동유럽식 인사이다.] 조국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보고 감격에 차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상적이다. 1962년까지 흐루쇼프의 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튼튼했지만, 그의 건강 악화와 동시에 나타난 지도력 저하가 다른 지도진의 신뢰를 무너뜨려 그의 정치 기반이 흔들렸고,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 문제가 한층 더 심화돼 흐루쇼프의 지도력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표면상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에 충실했지만 [[알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알렉산드르 셸레핀의 권유로 1963년 흐루쇼프의 추방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흐루쇼프도 낌새를 눈치채었지만 [[스탈린]]처럼 브레즈네프를 제거하기는 커녕 소련 지도부에 또 다른 혼란이 발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순순히 물러나기로 했다. 결국 흐루쇼프는 1964년 10월 13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으로 실각하였고, 브레즈네프는 소련 공산당 제1서기, 코시긴은 소련 장관회의 주석에 올랐다. 니콜라이 포드고르니는 은퇴를 맞이한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후임으로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취임했는데, 이 시기까지를 삼두정치 시기라 칭하기도 한다. 원래는 셸레핀까지 합쳐서 사두정치였으나 셸레핀이 제일 먼저 축출돼서 소련 직총중앙위원회로 좌천되면서 널리 알려진 브레즈네프-코시긴-포드고로니 체제가 자리잡히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